ⓒ 나무위키


조선총독부 철거는 식민역사의 청산을 위한 가장 시각적이고 물리적으로 인지하기 쉬운 대상이었다. 

폭력적인 건축물을 폭력적으로 응징하는 모습으로 건축은 최고의 도구였다.





 

[BOOK REVIEW : 건축 없는 국가, 이종건 비평집]



  대한민국에서 건축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건축에게 국가는 무엇이고 국가에게 건축은 어떠한 존재인가? 라는 생각의 꼬리가 계속해서 연결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 물음에 관한 이야기를 속시원하게 정리해줄 것 같은 책 건축비평집인 '건축 없는 국가'는 따가운 쓴소리도 들을 줄 아는 건축가들과 우리 사회에게 전하는 이야기들이다.

 

  전반적으로 내용들이 흥미로운 내용이면서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들 혹은 기성건축가들이 한 번쯤은 생각해보았을 사회구조적 문제 혹은 건축문화의 시스템에 관해 쉽게 정리하지 못하고 뒷골목 삼겹살집에서 소주 한 잔에 안주거리로 등장했지만, 그 이야기들에 대한 정리가 충분히 되어있으며, 이종건 선생님의 잘 갈아진 날카로운 비평의 날로 얼어 있었던 그 곳에 침투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우리나라의 활발한 건축 비평문화에 대해서 지지하고 싶다. 그리고 그 비평의 관문과 경계도 절대적인 학문의 철옹성보다 대중적이며 조금 열려있는 자세로 스스로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건축 비평의 최전방에서 그는 건축 없는 국가와 국가 없는 건축을 꿰뚫어 보았다. 열린 마음으로 그가 행했던 건축과 국가의 해부를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건축문화의 한 부분이 가질 존재의 무게를 더욱 실어 줄 수 있으니 말이다.

  


프리츠커상 수상에 대한 그의 의견


     프리츠커상에 대한 동경 저변에 깔린 '그들처럼 건축하기'라는 주권 없는 삶의 정신을 비판하고, 건축계에서의 프리츠커상은 마치 파농의 말을 인용해 백인 피부를 동경하고 갈망하는 식민주의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고 표현한다. 짐짓 그는 프리츠커상이 곧 건축학도, 더 나아가 건축가들에게 하나의 우상화로 비춰지는 단면을 조명하고자 한다. 이 글의 말미에는, 물론 우리 건축 사회에서도 우리들 만의 환경 속에서 자유로운 방식을 통해 프리츠커상을 거머쥔다면, 축하해야 할 일이라고 한다.

 

     사실, 나의 의구심은 이 한마디에서 비롯한다. 과연 우리가 건축을 배우면서 묵시적 세례를 통해 그들의 건축적 삶을 목표로 했는가이다. 그리고 그는 이 태도에 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프리츠커상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물론 많은 건축학도들은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건축가들에 대한 호의적인 자세와 함께 자의식이 강한 그들의 건축철학을 우러러 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건축학도들은 건축가로 양성되기 이전에 하나의 인간이다. 인간이기에 욕심이 있고, 우리 분야의 최고의 영광은 프리츠커상으로 전세계에 알리는 수단이다. 그 욕심은 물론이지 없다고 하면 다들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이가 이러한 욕망을 가지고 있더라도 결국 프리츠커상을 위한 방법은 없다. 처음에는 사회문화적 경향 혹은 디자인적 혁신에 관한 관점으로 예상되었을 수도 있으나 올해의 수상자였던 '프라이 오토'는 그 모든 관점을 부식시켜준다














ⓒ http://www.pritzkerprize.com/

2012 프리츠커상 수상자 중국건축가 왕슈와 지역성을 고려한 외벽 표현



        결국에는, 프리츠커상을 수여하는 기관에서 판단하는 일들이다. 그가 말하는 '그들의 건축'이 아니라 우리식의 건축을 하고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식의 건축이 무엇인가라는 내용의 부재는 글의 힘을 잃게 해준다. 과연, 현재 우리나라만의 건축은 무엇인가? 혹은 우리끼리의 건축은 어떤것일까? 라는 질문투성이로 남지말고,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건축가들이 한 번쯤은 고민을하고 실험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건축가의 태도에서도 출발하는 이 문제는 결국에 나는 우리사회가 바라보는 건축의 시점으로 끝났으면 한다. 공통적으로 프리츠커상 수상자가 나온 국가들을 보아야한다. 그 국가에서 이뤄지는 건축작품이 아니라 그 국가에서의 국민이 건축과 어떻게 호흡하고 있는지를...


인식의 나르시시즘


        한국적인 건축의 정체성 생산의 부재는 결국 기념비적이고 골동품적인 역사주의로 인해 기인된다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 현대사의 진행 속에서 지정학적 위치가 가지고 있는 컴플렉스가 한 몫한다고 지적한다. 북족과 서쪽으로는 공산주의의 이념적인 갈등과 함께 타도의 한 축이었으며, 남쪽으로는 바다가 동쪽으로는 아픈역사의 상흔도 지워지지 않게 만든 일본이 있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스스로 고립시켰고, 타자를 통해 스스로를 판단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당한 고아같은 존재로 우리의 현대사는 시간적 의미의 현대만 남겨두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가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새로운 시각이면서도, 상당히 흥미로운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의 삶 속에 타자를 적극 불러들이는 것으로 희미하게 가려진 한국적인 것을 찾기위한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아키텍처와 국가


         건축 혹은 아키텍처의 수준을 논하기 이전에 지배의 주체인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문제에 귀속된다. 즉 국가는 규정자이다. 2010년 상하이 엑스포를 예를 들어 보았을 때 중국관 과 미국관은 극히 대조적인 방식을 택한다. 그의 짐작으로 중국관은 국가 주도의 야심작이며, 미국관은 전혀 이들가 경쟁하려는 자세 없이 가드를 내리고 세계무대와 싸웠다


         내 경험을 비추어 보더라도, 엑스포 행사의 존재감 부분에서는 물리적으로 중국이 정신적으로는 미국으로 무의식적 선택을 통해 관람을 했다. 그 부분에서 미국관은 정말 실망만 남겼다. 그나마 기억을 상기시켜 보면 미국관에서는 건축은 없고, 전세계를 무대로 하는 글로벌 기업들의 스폰서들이 입구에 빽빽하게 자리 잡았으며, 엄청난 스크린에 나오는 미국대통령의 환영인상 정도 였다. 엑스포가 국가의 건축술을 뽐내는 경연장일 수 있으나, 미국은 굳이 퍼포먼스를 통해 힘을 쏟지 않았던 것 같다.

 

         마치 인공적인 가공없는 모습으로 관람객을 실망시킨 것 부분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보인다. 결국 엑스포에서 관람객으로 하여금 국가는 환상과 착각을 주입시켜주는 자리로 대표하는데 그 중 미국은 가장 절제를 한 것이지 않을까?




ⓒ http://news.xinhuanet.com/

2010 상하이 엑스포 국가관 (왼쪽) 중국관, (오른쪽) 미국관


비평


      그는 우리 건축의 문제는 비평의 부재로 꼽는다. 결국에는 건축문화 없는 국가를 지칭하는 것 같다. 수요가 없는 비평은 결국 사회가 싫은 소리를 배제함에 있어서 생겨났고 또한 보는 것에 익숙한 우리에게 사고의 부재를 깨닫게 해준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항상 이런식으로 대상과 상관없이 짓밟아왔다. 때거지 문화를 마치 스스로 정당하다라고 색칠을 하고 말이다


      항상 무리지어 다니며, 천천히 제거해 간다. 자신들에게는 때가 뭍으면 안되니 말이다. 비평없는 발전은 없고 발전을 원치 않는 건축에서 우리는 더이상 건축을 문화로 찬미할 이유도 없다. 적어도 건축문화를 이끌기 위함이고 대중과 친숙하기 위한다면, 건축가도 스스로 비평에 대해서 호의적일 필요는 있다.




건축 없는 국가
국내도서
저자 : 이종건
출판 : SPACETIME(스페이스타임) 201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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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0Fany 트랙백 0 : 댓글 2